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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경남 여행 - 합천 해인사 (CNN 추천 여행지)

by 버들도령 2021.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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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여행 - 합천 해인사 (CNN 추천 여행지)

13. Haeinsa Temple, Hapcheon (합천 해인사)

합천 해인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온전한 불교 경전인 팔만대장경은 1,200년 된 해인사에 정성스럽게 모셔져 있습니다.

산벚나무로 만든 합천 해인사 팔만대장경 진본

이 절의 다른 유적지로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불상(해인사 비로자나)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장경판전이 있습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 팔만대장경

불교를 숭상한 고려는 외침(外侵, 외세의 침략)을 부처의 힘으로 막고자 방대한 대장경의 간행사업을 추진했다.

제1차는 거란의 침입으로 곤경에 직면했을 때 불력으로 물리치고자 대구 팔공산 부인사(符仁寺)에 도감(都監)을 두고, 《대반야경(大般若經)》·《화엄경(華嚴經)》·《금광명경(金光明經)》·《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등 6,000여 권을 조조(彫造)하였다. 현종 때 시작하여 문종 때 완성된 이 초판 고본(古本) 대장경은 고종 19년(1232)의 몽골 침입 때 불타고, 일부가 일본에 전해진다.

그 후 대각국사 의천이 흥왕사(興王寺)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고, 송에서 가져온 불경과 요(遼) · 일본에서 수집한 불경의 총목록을 작성하고, 이에 따라 차례로 만들었다. 이것이 이른바 속대장경(續大藏經)으로 1,010부(部) 4,740여 권에 달하였으나, 몽골의 병화로 거의 없어지고 일부가 전해지고 있다.

그 후 강화도에서 몽골의 침입을 막아보고자 대대적인 조판 사업이 진행되었다. 고종 23년(1236) 강화도에 장경도감(藏經都監)을 설치하여 사업에 착수, 고종 38년(1251) 총 81,137매(枚)의 대장경을 완성하였는데, 이것이 유명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으로 합천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다. 대장경의 조판으로 인쇄술의 발달과 출판 기술에 큰 공헌을 하였다. 현재 보존되어 있는 대장경판은 조선 시대에 다시 새긴 것(보유판)과 일제 강점기 때 다시 새긴 것까지 합하여 총 81,352판(板)이나 된다.
출처 : 위키피디아

고려팔만대장경은 중국과 일본 등지에서 수집한 1511종 6802권에 달하는 경전들을 가로 70㎝ 세로 24㎝​의 나무판 8만1352장​ 앞·뒷면에 빼곡하게 새겨 놓은 경판으로, 이 경판들을 모두 쌓으면 백두산(2744m) 보다 높은 3200m에 달한다. 나무판에 새겨진 5230만자 가운데 틀린 글자가 130여자에 불과, 당대 최고의 인쇄 및 간행기술의 사례로 우리나라 문명의 보고이자 동아시아 문명의 결정체로 평가되고 있다.

10 Chiin-ri, Gaya-myeon, Hapcheon-gun, Gyeongsangnam-do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번지)

 

  • 문의 및 안내 : 해인사(합천) 055-934-3000
    매표소 055-934-3140
  • 홈페이지 : 해인사 http://www.haeinsa.or.kr
                   ☞ 템플스테이 보러가기
  • 주소 :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22
  • 이용시간 : [팔만대장경 관람시간] 하절기 08:30∼18:00 / 동절기 08:30∼17:00
  • 휴일 : 연중무휴
  • 주차 : 있음
  • 입 장 료 : 어른 3000원, 청소년 1500원, 어린이 700원
  • 출입통로 : 주출입구는 경사로가 있어 휠체어 접근 가능함
  • 주차 : 장애인 주차장 있음_무장애 편의시설
  • 접근로 : 출입구까지 턱이 없어 휠체어 접근 가능함
  • 화장실 : 장애인 화장실 있음

역사적 변천

의상(義湘)의 화엄10찰(華嚴十刹) 중 하나이고, 팔만대장경판(八萬大藏經板)을 봉안한 법보사찰(法寶寺刹)이며, 대한불교조계종의 종합 수도도량이다. 이 절은 신라 애장왕 때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 창건하였다.

신림(神琳)의 제자 순응은 766년(혜공왕 2) 중국으로 구도의 길을 떠났다가 수년 뒤 귀국하여 가야산에서 정진하였으며, 802년(애장왕 3) 해인사 창건에 착수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성목태후(聖穆太后)가 불사(佛事)를 도와 전지(田地) 2,500결(結)을 하사하였다. 순응이 갑자기 죽자 이정이 그의 뒤를 이어 절을 완성하였다.

해인사의 해인은 『화엄경』중에 나오는 ‘해인삼매(海印三昧)’에서 유래한 것이다. 따라서, 해인사는 화엄의 철학, 화엄의 사상을 천명하고자 하는 뜻으로 이루어진 화엄의 대도량이다. 창건주인 순응은 의상의 법손(法孫)으로서, 해인삼매에 근거를 두고 해인사라 명명하였던 사실에서 그의 창사(創寺)의 이념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화엄의 철학, 화엄의 사상을 널리 펴고자 하였다.

이러한 창사의 정신은 뒷날에도 오래오래 받들어져, 고려 태조의 복전(福田: 귀의(歸依)를 받았다는 뜻)이었던 희랑(希朗)이 이곳에서 화엄사상을 펼쳤다. 현재 해인사의 사간장경(寺刊藏經) 중에 화엄 관련 문헌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이를 입증하는 자료가 된다. 특히 고려의 태조는 희랑이 후백제 견훤을 뿌리치고 도와준 데 대한 보답으로 이 절을 고려의 국찰(國刹)로 삼고 해동 제일의 도량으로 만들었다. 즉, 희랑이 후백제와의 전쟁에서 태조를 도와 승전하게 하였으므로, 태조는 전지 500결을 헌납하여 사우(寺宇)를 중건하게 하였다.

1398년(태조 7)에는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있던 팔만대장경판을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가 이듬해 이곳으로 옮겨옴으로써 해인사는 호국신앙의 요람이 되었다. 그 뒤 세조는 장경각(藏經閣)을 확장하고 개수하였다.

1483년(성종 14) 세조의 비 정희왕후(貞熹王后)가 해인사 중건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1488년 인수왕비(仁粹王妃)와 인혜왕비(仁惠王妃)가 학조(學祖)에게 공사를 감독할 것을 명하고 대장경판당(大藏經板堂)을 중건하였다. 또한, 3년 동안의 공사 끝에 대적광전(大寂光殿)을 비롯하여 법당과 요사(寮舍) 160칸을 신축하였다.

그러나 1695년(숙종 21)에 화재로 여러 요사와 만월당(滿月堂)·원음루(圓音樓)가 불탔으며, 그 이듬해 봄에 또 불이 나서 서쪽 여러 요사와 무설전(無說殿)이 불타버리자 뇌음(雷音)이 중건하였다.

1743년(영조 19)에 또 화재로 인해 큰 축대 아래 수백 칸이 불타 버렸지만, 당시 경상도 관찰사 김상성(金尙星)의 도움으로 능운(凌雲)이 중건하였다. 또 1763년에 실수로 불이 났으나 관찰사 김상철(金尙喆)의 협조로 설파(雪坡)가 중건하였으며, 1780년(정조 4)에 불이 나자 5년 만에 성파(惺坡)가 중건하였다.

1817년(순조 17)에 다시 큰불이 나서 수천 칸이 모두 불타버렸는데, 관찰사 김노경(金露敬)의 도움으로 영월(影月)·연월(淵月) 등이 소규모로 중건하였으며, 1871년(고종 8)에 법성료(法性寮)가 다시 불에 탔다. 이와 같이 이 절은 창건 이래 수많은 화재를 겪었으나 장경각만은 온전히 보전되어 왔다.

조선시대의 불교 탄압시에 36개의 사찰만을 남겨둔 적이 있었는데, 그때에 해인사는 교종(敎宗) 18개 사찰 중의 하나로 남아 전답 200결과 승려 100명을 지정받았다. 또, 1902년에 원흥사(元興寺)를 전국의 수사찰(首寺刹)로 정하고 전국에 16개 중법산(中法山)을 두었을 때는 영남 중법산으로 수사찰이 되었으며, 1911년에 전국을 30본산(本山)으로 나누었을 때 16개 말사를 관장하는 본산이 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합천 해인사(陜川 海印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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