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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ㆍ음악/연예

‘나, 다니엘 블레이크(I, Daniel Blake)’ - 영화 칼럼

by 버들도령 2021. 1.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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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칼럼] ‘나, 다니엘 블레이크(I, Daniel Blake)’

(2016년 감독_켄 로치)

이대현 요나(국민대 겸임교수, 영화평론가)

‘자존심’을 지켜주지 않으면

 

모든 인간에게는 자존심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선물입니다. 자신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는 그 마음의 무게는 누구나 같은데도 세상은 이따금 이를 무시하려 합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가난하고, 늙고, 병든 사람들의 자존심을 가볍고 하찮게 여깁니다.

도움, 자선, 나눔, 구제, 참 좋은 것이지요. 함께 사는 세상을 위한 아름답고, 따뜻한 실천입니다. 그 실천이 개인이 아닌 사회 공동체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물질적 도움이 최소한의 삶과 인간다움을 바라는 사람들을 구차하게 만들고, 자존심을 잃게 만든다면 사랑과 복지가 아니라 차별과 상처가 아닐까요.

영화 속 다니엘 블레이크(데이브 존스 분)는 이 질문에 “예”라고 말합니다. 심장병으로 40년 동안 해오던 목수 일을 중단하고, 질병 수당을 받기 위해 발버둥 치면서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수치심뿐이었으니까요. 정부가 고용한 파견업체 의료 전문가와 심사관의 무성의한 태도, 문의 전화 한 통을 위해 무려 1시간 48분을 기다리게 한 ARS, 복잡한 행정절차, 조금의 융통성도 배려도 없이 ‘연필 시대의 사람’에게 인터넷을 강요하는 세상 앞에서 그는 좌절합니다.

두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 케이티(헤일리 스콰이어 분)는 어떻고요. 2년 동안의 노숙자 쉼터 생활에서 겨우 벗어났지만, 버스를 잘못 타 심사에 조금 늦었다는 이유로 생활보조금 지급 제재 대상 명단에 올라갈 위기에 처합니다. 항의해 보지만 “정시 출석은 의무사항”, “원칙이 우선”이라는 냉랭한 말만 듣습니다. 영국만 이럴까요. ‘요람에서 무덤까지’라고 떠들며 온갖 복지와 사회보장을 만들어 놓으면 뭐 합니까. 시혜자로 착각하는 오만한 공무원들과 편의주의 시스템이란 높은 벽이 사람들을 힘들고 구차하게 만든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래서 다니엘도 “사람은 자존심을 잃으면 다 잃은 거요”라고 말하면서 돌아섭니다.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진정한 나눔과 구제는 다수결도, 선택도, 숫자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알량한 돈 몇 푼으로 자존심에 상처를 주어서도 안 된다고 말합니다.

다니엘은 전기가 끊겨 추위에 떠는 케이티 가족을 위해 돈을 몰래 놓고 나옵니다. 자신의 목공 기술로 집을 고쳐줍니다. 너무 배가 고파 식료품 지원소에서 통조림을 허겁지겁 먹고는 눈물을 쏟아내는 케이티에게 “자네 잘못 아니야. 부끄러워할 것 없어”라고 말해줍니다. 나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돕고 애틋하게 감싸주면서도 오히려 상대를 존중하는 그는 결코 천사가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아닙니다. 나는 보험 번호 숫자도, 화면 속의 점도 아닙니다. 난 묵묵히 책임을 다해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난 굽실대지 않았고, 이웃이 어려우면 그들을 도왔습니다. 자선을 구걸하거나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그가 지금 우리를 성찰할 기회를 줍니다. 우리 모두 다니엘 블레이크가 될 수도 있고, 누구도 다니엘 블레이크가 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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